자유게시판
| Part 1. 기획서의 기준과 구조 내 작업은 왜 설득되지 않았을까? – 예술의 가치를 기획자의 언어로 정리하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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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26-05-06 | 작성자 | 모모365 |
Q.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와 기획자라는 직업을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지금 기획하고 있는 작업이나 프로젝트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조영신 안녕하세요. 서울시자치구문화재단연합회 사무처장 조영신입니다. 서울시자치구문화재단연합회는 서울시 내 24개의 회원 기관을 갖고 있는 사단법인이에요. 오래 전 소속되었던 사단법인은 지원 사업을 받지 않으면 운영이 안 되는 구조이다보니, 가장 많을 때는 1년에 한 40개 정도의 제안서를 썼었는데요. 다양하게 선정된 경험을 갖고 있다 보니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좀 있을 것 같아 참여하게 됐습니다. 저는 이력이 좀 특이해요. 회사에 다니다 서울에 있는 작은 민간 음악 단체 사무처에서 제안을 받고 일을 시작하게 됐거든요. 알고 지내던 선배 한 분이 서울로 올라와서 사무실 좀 맡아주면 안 되겠냐고 하더라고요. 꽤 안정적인 월급을 내려놓고 30만 원의 수습으로 시작했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35살의 12월이었어요. 그때 당시 여성 평균 수명이 68세 정도였거든요? 계속 평균 수명이 늘고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아직도 못해 본 일이 있고 계속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문화오픈>, <민족평화축전>, <세계문화다양성연대회의> 등 국제회의를 통해 다양한 실무를 거쳤고,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화관광부 광주문화의 달 총연출>, <광복60주년 문화 사업 추진위원회 사무국장> 같은 국가사업을 맡게 됐어요. 그 이후로 <인천펜타포트락페스티벌>, <도심 속 바다 축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진주전국생활문화축제 10주년> 같은 문화예술 축제의 총감독으로 일을 하게 됐습니다. 현재는 작년부터 <전남문화재단 공연장 협력 사업> 책임 심의위원을 맡아 공연과 조금 더 가까워지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곡성에서 개최되는 <섬진강 예술제> 운영 위원으로 지역에서 축제를 실험하는 일을 경험할 것 같습니다. 현재 60세가 넘은 여성 총감독은 아마 제가 유일하지 싶어요. 잘해서라기보다는 유일하게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지만요. 이쪽 진로로 희망을 품는 여러분에게 한 명의 지표가 되고 싶습니다.
최선영 안녕하세요. 문화예술 기획자 최선영입니다. 원래는 미대를 졸업하고, 작업실 월세를 벌려고 예술 단체에 잠깐 들어가 문화예술교육 사업 보조 일을 맡은 게 시작이었어요. 그 이후 개인 창작보다는 시민들을 만나거나 교육 활동을 하거나 하는 커뮤니티 기반의 작업이 잘 맞아서 이런 프로젝트에 결합한 활동을 더 많이 하게 됐고요. 하다 보니 기획의 역할도 같이 하게 됐어요. 내 작품 세계에 집중하는 것보다 다양한 경험들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20대 중반쯤, 문화예술교육과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하는 와중에 기획팀 활동을 시작하면서 점점 ‘저도 이 꼭지 하나 맡아볼래요’, ‘제가 주강사 할래요’ 하고 단체 대표님한테 말씀드리는 일이 많아졌어요. 경력은 부족하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관심이 생기는 분야가 많아지면서 역할을 주도적으로 키워오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장애인의 다양한 예술 활동, 장애인 비장애인 통합 작업, 그리고 문화 다양성이나 시민들이 함께할 수 있는 활동 등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개인 창작을 하던 사람이다 보니까 행사성으로 사업을 기획하는 것보다 그 안에서 어떤 행위를 하면서 무언가를 실천하거나 작업하는 것에 재미를 느껴요. 지금도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리거나 나무를 깎거나 가사를 쓰는 창작 행위를 조금씩 하고 있는데요. 이런 예술 행위를 삶의 일부로 두며 지속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술가들의 일상적 활동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과 권리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그리고 동시에 정책적인 뒷받침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최근에는 연구자 역할로 현장의 어려움이나 상황을 언어적으로 기술하는 작업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개인 창작이나 공공기관과 협력한 프로젝트를 하며 저도 지원서를 많이 썼고, 많이 떨어지기도 했었는데요. 그런 경험 덕분에 관련 컨설팅이나 심사도 하게 되었네요. 기획서 관련 고민을 하는 분들의 현장 속 이야기를 오늘 많이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황상훈 기분좋은큐엑스(주)의 황상훈 대표입니다. 대학 다닐 때 축제 기획을 하다가 졸업하고 선배와 함께 문화 기획 회사를 차리게 됐어요. 그게 지금까지 쭉 이어져 오고 있네요. 문화판에 들어온 첫 시작이 축제로부터 시작됐다 볼 수 있겠어요. 문화 콘텐츠에 투자하는 일을 진행하면서 좋은 콘텐츠를 소개하고 창작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투자 중계를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었는데요. 지금은 연구와 컨설팅으로 거의 20년 가까이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회사에서 경영을 맡고 있지만, 여전히 문화 기획을 하면서 정책과 사업의 계획을 세우고 연구, 평가하면서 각 지자체나 문화재단의 자문 심사 평가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요. 역마살이 있나 봐요. (웃음)
Q. 기획서의 뼈대를 잡을 때 중요한 작업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최선영 평소에 하던 고민을 쓰는 게 기획서라고 생각하거든요. 생각과 고민을 많이 해야 해요. 평소에 리서치를 많이 하는 사람의 기획서는 다르더라고요. 여기서 말하는 리서치란, 자료 수집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예술가라고 치면 딴짓도 좀 많이 하고, 주로 자기가 몸담고 있는 기반, 장르를 얘기하더라도 그 안에서 갖고 있는 감각이나 표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것.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어떻게 언어적으로 기술할지에 대한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이 고민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기획서를 잘 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관심 있는 이슈나 감각 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언어로 정리하고 탐색하는 것이 예술가라면 당연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기획서를 가지고 예술가들과 얘기하다 보면 결국에는 작업자의 태도에 대한 멘토링을 하게 되거든요. 기획서는 이걸 건드릴 수 있는 장치 정도라고 생각해요. 평소에 많이 고민하고 실험해야 해요. 조영신 평소에 자기 관점을 가지고 계속 고민하다 보면, ‘이 고민을 어떻게 풀어갈까?’라는 생각이 들고, 이런 고민이 쌓여 있는 상태에서 기획을 해야 내용이 풍성해지죠. 그래야, 하려고 하는 목적과 목표도 분명해져요. 방향이 없는 상태에서 사업에 맞춘 기획이 나오게 되면 필요성이나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는 기획서가 될 수밖에 없어요.
황상훈 솔직히 우연으로 한 번 정도는 뽑힐 수 있겠죠. 근데 그러면 그렇게 해도 되는 줄 알고 기획서가 그런 방향으로만 흘러가요. 그러다 보면 스스로가 지원 사업만 바라보는 한계 상황에 직면하거든요. 관심 있는 분야를 고민하고 그 고민에 다시 살을 붙여주고 하는 작업이 필요해요. 하지만 이런 작업은 다양한 영역과 만나서 일을 벌일 때 더 가능하죠. 예술가들은 대체로 자신의 전문적 창작 영역 안에서만 일을 하게 되니 시야가 좁아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요. 기획서에는 내가 이것을 왜 하려고 했고, 왜 고민하고, 왜 이 작업을 해서 글을 쓰는지에 대한 질문에 자기 정당성이나 자기 이해, 자기 이야기가 응축되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심사 위원들은 설득당할 수 없어요. 어떤 기획서든지 간에 구조는 거의 동일하거든요? ‘왜’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자기 답변이 성실하게 준비된 기획서가 있으면 조금 부족하거나 예산이 틀려도 큰 문제가 안 될 텐데,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준비가 안 된 상태라면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설명이 흐지부지돼요. 그리고 또 하나, 기승전결과 수미상관이 맞아야 해요. 기획 의도와 추진 방향, 내가 거두려고 하는 목적과 이 목적을 위해서 가능한 프로그램,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 거둘 수 있는 기대 효과. 이 네 가지가 주요한 지점이에요. 추진 배경과 의도 때문에 목적이 가능하고 이 목적 때문에 결국 이 프로그램이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그래야 기대 효과가 성취될 수 있죠. 예산이 부족해서… 라는 말을 서두로 달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렇게 얘기를 시작하면 자기 작업에 관한 얘기는 적어져요. 기대 효과도 그래요. ‘문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서울 시민에게 이 예술을 통해 문화적 감수성을 신장하겠다.’ 200만 원으로 신장할 수 있었다면 저와 같은 사람들은 이미 다 그만뒀겠죠. 자기 성찰이 없으니까, 자기 고민이 없으니까 다른 제안이나 기획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마치 자기 거인 양 기승전결 안에 나열되어져 있는 거예요. 기본은 장르나 차별성하고 관계없어요. 기획서 안에서 자기 차별성을 어떻게 표출하고 기술하는가가 각자 다를지라도 기본을 넘어설 수는 없는 거죠. 이게 기획서 작성 측면에서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합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앞단의 얘기가 뒷부분까지 쭉 같은 목적과 내용을 가지고 풀려야 해요. 그리고 앞서 얘기해 주셨던 것 중 ‘왜’라는 측면이 정말 중요해요. ‘왜’가 잡혀야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얘기가 정리가 되거든요. ‘왜’가 없으면 공모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써주는 것밖에 안 돼요. 기획 의도에서 제일 중요한 건 어떤 메시지를 세상에 전달할 거냐, 세상에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예요. 이게 있어야 의미가 잡혀요. 그래야 이런 의미가 있구나 하고 심사 위원들이 공감하고 한 번 더 보게 되죠. 그 의미가 기승전결로 오는 것. 그러니까 의미가 스토리텔링이 돼야 해요. Q. 공모 사업이라 하면 주최, 주관처가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하잖아요. ‘이런 작품을 뽑고 싶다’ 하는 것이요. 만약에 그게 내가 펼치려는 예술과 맞지 않을 때, 일종의 합의 방법 같은 게 있는지 궁금해요.
최선영 지원 사업에 선정되는 게 중요해 보이지만, 그보다 먼저 자기의 창작 의도를 언어화하는 과정이 제일 중요해요. 이건 오로지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지금의 예술가 대상 지원 사업들은 ‘당신이 이걸 왜 하는지 납득이 되면 선정하겠다’라는 게 대부분이에요. 그런데 이 지원 사업을 이렇게 써야 하나 저렇게 써야 하나, 이래야 붙는다더라, 구체적으로는 이런 말들을 써줘야 붙는다더라 하는 소문이 오해처럼 있어요. 너무 개인적이거나 사소하거나 일상적인 표현을 쓰면 전문성이 떨어져 보여서 그렇게 쓰면 안 된다더라 라는 말도 있고요. 그러다 보니 정책 용어나 지원 사업 공고문에 나와 있는 용어를 핵심 용어로 쓰게 돼요. 지역 문화를 활성화하겠다 뭐 이런 식으로요. 그러면 계속 질문할 수밖에 없어요. 지역 문화를 활성화한다는 게 무엇일까요? 누군가는 축제가 열리는 게 활성화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카페나 문화 공간이 많고 거기에서 사람들의 일상이 소소하게 이어지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재미있게 놀 곳이 많아지는 게 활성화일 수도 있겠죠. 말이란 건 여러 가지 층위가 있는데요. 거시적이고 관념적인 표현을 갑자기 가져오는 건 그런 오해와 편견 같은 이상한 소문 때문 아닐까 싶어요. 그러다 보니 들어오는 기획서 100개 중 한 80, 90개는 동일한 말을 쓰게 되죠. 문화 예술 분야는 다양성이 중요한데요. 이런 문제에 직면하는 이유는 자기 언어가 축적되지 않았다는 것과 동시에 자기 언어에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써야 해요. ‘그렇게 쓰면 안 돼’라고 할지라도 자기 언어를 충분히 고민해 왔다면, 쓸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축적되어야 하겠죠. 이렇게 썼는데도 못 알아들을 거면 뽑지 마. 내가 더 전문가야. 이런 마음, 이런 태도가 예술가라면 필요하지 않을까요.
황상훈 반대 얘기도 해볼게요. 그러니까 과업 지시서에 맞춰서 글을 쓴다고 해도 지원자들이 글을 읽지 않아요. 공공 재원의 기금을 마련할 때는 수많은 부처와 그 과가 이루어지게 된 정책 방향과 목적이 있잖아요. 기금이라는 걸 통해서 재원을 형성해 공모를 한다고 하는 건 성과를 거두기 위한 거예요. 과업 지시서를 보면 ‘본 사업은~’으로 시작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 말만 보고 따와서 작성하죠. 궁극적으로는 ‘이 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 영역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걸 쓰라는 얘기인데요. ‘올해 사업의 취지는 이렇게 됐고, 전년도와 뭐가 변화됐고, 우리 사회의 정책적 목표 중 어떤 것이 전환돼서 이 사업은 이런 성과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라고 쓰여 있는 기본 지표가 있을 거예요. 그걸 내가 하고 싶었던 일과 얼마큼 맞는지에 대한 것부터 계산이 된 후에 ‘내 작업은 이 사업 목적에 부합하고, 나는 성과를 낼 수 있다.’ 하고 쓰면 되는 거죠. 조영신 그러니까 고민이 쌓여 자기 언어로 표현되는 건 맞는데, 그 사업에서 요구하는 취지와 목적에 부합해야 해요. 그러려면 사업을 잘 이해해야 하죠. 이 사업을 왜 하는지, 뭘 얻으려고 하는지 목적을 파악한 후에 내 작업과 매칭시켜야 해요. 나 따로 사업 따로가 아니라요. ‘이 사업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는지’, ‘시도해 볼 만한지’ 같은 나와 사업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야 심사 위원들이 ‘아, 이 사업과 부합하는구나. 선정하면 새로운 성과 내지는 새로운 시도들이 있겠구나’ 하고 보게 되겠죠. Q. 아까 얘기 나온 것 중 기획서에 관한 오해가 있었는데요. 주로 어떤 오해나 오류가 일어나고,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영신 지원사업은 공공 재원을 가져가는 거예요. 내 전문적 역량을 신뢰하고 주는 거죠. ‘사업 제안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기본을 갖고 있다.’라는 전제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원하는 것을 잘못 말하면 오류가 될 수 있죠.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이 작업이 너무 좋아서 열심히 했다는 자기애는 공공 재원을 갖다 쓸 수 있는 합리적 이유가 되지 못하니까요. 기금의 방향이 현시대를 못 쫓아간다는 얘기를 할 순 있어도 못 담아낸다고 얘기를 할 수 없는 건, 기금 자체가 그렇게 구성되도록 만들어져서 내려온 기본 바탕이 있기 때문이에요. 기금의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오해나 오류를 없애는 기본이 되죠. 내 돈이 아닌 세금이니까요. 남의 돈이니까요. 남의 돈을 갖다 쓰려면 남의 돈을 잘 쓸 수 있다는 신뢰를 본인이 형성해야 해요. ‘나는 허투루 쓰는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얘기를 한다고 되는 게 아니죠. 오해와 오류는 과업 지시나 사업의 설명 같은 것들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이해나 고민이 충분히 되지 않은 고정관념은 상상력을 막아요. 예를 들면 예술이 대중적이지 않다. 클래식이 국악이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다. 그래서 쉽게 접근하기 위해 ‘트로트를 오케스트라로 들려준다’. 이런 도식적인 방법이 양산되거나 되풀이돼요.
최선영 예술가들과 일대일로 만나서 얘기해 보면 그런 말을 왜 쓰는지 알 수 있어요. 거시적인 얘기를 해야 자신이 사회를 크게 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 그런 것 같은데요. 세상을, 모든 것을 다 구하려고 하는 건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세밀하게 자신의 전문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주려면 자신의 경험적 언어를 넣어야 하죠. 일상적이고 개인적일 수도 있는데요. 깊이가 있다면 충분히 설득될 수 있어요. 하지만 또 다른 오류에 빠지기도 하는데요. ‘의도가 좋고 진정성이 있다면 뭘 해도 좋은 기획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하지만 이러면 의도만 너무 거창해지죠. 굉장히 섬세한 기획 의도에 비해 결국 하는 건 ‘시민 대상 음악회를 몇 회차 하겠다.’ 이렇게 되기도 하고요. 이거는 기획서의 문제가 아니라 기획력이 부족한 거예요. 기획이 그래서 어려운 거죠. 복잡하지 않게 정확한 의도를 담아서 자연스러운 형태와 방식으로 구현한 뒤 계획을 보여줘야 해요. ‘어떤 의도가 있는데 최소한 이런 것을 그리고 있다.’라는 계획성은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보여줘야 한다는 오해에 빠지면 기획 의도가 정리되지 않고, 기획 의도와 계획의 매칭이 안 되기도 하죠. 그러면 세부안만 확정돼요. 큰 방향이 없는데 너무 촘촘해지는 거예요. 자유로움이 중심인데 하나도 자유롭지 않은 계획서가 나오겠죠. 오류와 오해를 잡아주는 중심을 가진 기획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조영신 기획서의 신뢰도를 높이는 포인트. 이 부분은 어려운 말이 필요 없어요. 자기가 하려고 하는 일에 얼마만큼 자기 언어를 사용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구체적이라는 건 세세하다거나 촘촘하다는 것과 달라요. 예를 들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가 섭외를 해서 그 작가의 특징을 이용한 기획 의도를 작성했다고 쳐요. ‘시민들이 좋아하는 어떤 감각과 매치하기 위해 야외에서 전시해야 한다.’ 이렇게 연결이 돼야 맞겠죠. 구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문가든 비전문가든 누가 봐도 쉽고 분명하게 드러나요. 구체화를 위해 예술을 정량화, 수치화하라고 하는 게 가능하냐는 질문이 있었는데요. 가능합니다. ’이 작품을 몇 명이 보게 하겠다’ 이런 건 정량화가 아니고요.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작업이 실제로 작년과 재작년 유사한 제목으로 몇 회 정도의 공연이 있어 왔고, 리서치한 내용을 경향으로 정리하는 정도면 심사 위원들은 충분히 판단하거든요. 불완전하면 근거를 들어 정확한 수치가 아니라는 걸 표기해도 돼요. 내가 이걸 얼마만큼 성의 있게 찾아보고 알아봤는지가 중요해요.
작년인가 심사하는데 기획서 두 개가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들어왔어요. 요즘 AI가 기획서를 쓰는 경우가 있어요. 불편한 사실이죠. 예술가나 창작자, 기획자의 미래를 걸고 AI로 기획서를 쓰는 시대를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활용은 하되 기획의 보편성이나 신뢰를 형성한 후 사례나 수치, 변화의 방향을 발굴할 때 사용하세요. 결국 본인의 부지런함이 가장 유용해요. 그리고 나를 이해 못 해서 안 주는 거라고 오해하고 가르치려는 기획서도 있어요. 예를 들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관한 전시를 기획한대요.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는데, 한 장을 다 쓰고 기획에 관련된 내용은 무색하게 두 줄이라든지. 재즈의 역사와 현실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작곡한 음악의 필요성을 나열한 후, 대중적이지 않아 음반은 유통이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분석해 놓으면, 그건 선정돼도 이상하지 않을까요? 기획서는 글이지만 신기하게도 그 사람이 보입니다. 카톡 문자에 감정이 있듯이요. 기획서의 신뢰는 구체성을 확보하려고 얼마나 성의있게 노력했는지가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황상훈 기획의 신뢰도를 높이는 포인트는 두 분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데요. 저는 두 가지로 봤어요. 진정성, 그다음에 구체성. 어떤 기획 의도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 의미에 진심을 담아 잘 드러내는 게 중요한데요. 어떤 결과치에만 매몰되는 게 아니라 접근 방식과 과정, 이런 것부터 진정성을 가지고 시작해야 해요. 그리고 말씀하신 조사 탐구 과정에 충실해야 해요. 이런 과정이 모여야 진정성 있는 얘기가 될 수 있고,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실행 계획이 구체적으로 짜이죠. 용두사미가 되면 안 돼요. 하고 싶은 건 많으면서 실행이 몇 줄로 끝나버리면 안 되겠죠.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해야 신뢰도를 높일 수 있어요. ‘의미는 알겠어. 그런데 어떻게 할 거야?’가 되지 않게요. 진정성과 구체성을 계속 섞어줘야 해요. 진정성만 크거나 구체성만 크거나 하면 균형이 없어지는 거니까요. 균형을 잘 갖춰야 해요. 아까 뼈대 잡는 얘기 나왔잖아요. why에 대한 고민을 충실히 하고 그다음에 how, 어떻게 풀어갈 거냐 또 뭘 할 거냐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해요. why와 what이 계속 반복되면서 내 의도가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있는지 고민하다 보면, 두 가지 완성도를 챙길 수 있겠죠.
*다음 콘텐츠인 Part. 2 작업은 좋은데 설명이 어려울 때 – 내 작업을 기억하게 쓰는 법은 5월 13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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